- 러시아 칼랴진에 자리한 지름 64m 전파망원경, 소련 심우주 통신 계획과 함께 개발
- 행성 탐사 지원에서 펄서 관측까지 시대 변화 따라 전파천문학 연구시설로 활용
눈 덮인 숲 너머로 거대한 원형 구조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주변의 나무들이 작게 느껴질 만큼 압도적인 크기의 이 시설은 러시아 트베리주(Tver Oblast) 칼랴진(Kalyazin) 인근에 자리한 ‘RT-64’ 전파망원경이다. 지름 64m의 거대한 접시형 반사경은 소련이 우주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시대의 기술적 흔적을 보여준다.
과학·자연 콘텐츠를 소개하는 ‘마시모(Massimo)’는 8월 30일 오후 4시 15분 X 계정에 RT-64 사진을 올리고 ‘거대한 소련 안테나(Giant Soviet antenna)’라고 소개했다. 마시모는 이 시설이 금성과 화성 탐사 임무와 통신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설명했다.
RT-64는 모스크바에서 북쪽으로 약 200㎞ 떨어진 칼랴진 인근에 있다.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산하 레베데프물리연구소 천체우주센터(Astro Space Center)의 칼랴진 전파천문대가 운영하는 시설로, ‘TNA-1500’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지름 64m에 이르는 거대한 주 반사경이다.
이 같은 대형 안테나는 우주에서 지구까지 도달하는 매우 약한 전파 신호를 모으는 역할을 한다. 칼랴진 RT-64는 지름 64m의 주 반사경과 6m 크기의 보조 반사경을 갖추고 있으며, 여러 주파수 대역에서 전파를 수신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RT-64의 역사는 냉전시대 소련의 우주개발과 맞닿아 있다. 당시 소련은 금성과 화성 등 태양계 행성을 향해 잇따라 무인 탐사선을 보내면서 지구와 먼 거리에 있는 우주선의 신호를 수신하고 통신할 수 있는 대형 안테나 시설을 구축했다.
다만 마시모의 게시물처럼 RT-64가 단순히 ‘1980년대에 건설됐다’고 설명하기에는 관련 시설의 역사가 조금 더 길다. 같은 계열인 TNA-1500 안테나는 1960년대 말부터 건설이 시작됐고 1970년대 말 가동에 들어간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후 1980년대 소련의 본격적인 행성 탐사 과정에서 활용 범위가 넓어졌다.
실제로 RT-64 계열 시설은 여러 우주탐사 임무에 참여했다. 1983~1984년에는 소련의 금성 탐사선 ‘베네라 15·16호(Venera 15·16)’가 레이더 관측을 통해 보내온 자료를 수신하는 데 활용됐다.
이어 1986년 ‘베가(Vega)’ 프로그램과 1988~1989년 ‘포보스(Phobos)’ 프로그램에도 사용됐다. 특히 베가 1·2호가 금성을 탐사할 당시에는 국제 초장기선 전파간섭계(VLBI) 관측망의 일부로 참여해 금성 대기를 이동하는 기구형 탐사체를 추적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는 시설의 역할도 달라졌다. 우주탐사선과의 통신을 지원했던 대형 안테나는 점차 우주에서 날아오는 전파를 관측하는 전파천문학 연구시설로 활용 영역을 넓혀갔다.
현재 칼랴진 전파천문대는 러시아과학아카데미 레베데프물리연구소 천체우주센터 산하에서 운영되고 있다. 천문대는 기존 TNA-1500 안테나를 기반으로 2001년 설립됐다.
대표적인 연구 분야 가운데 하나가 펄서(pulsar) 관측이다. 펄서는 빠르게 회전하면서 일정한 간격으로 전파를 방출하는 중성자별이다. 칼랴진에서는 1990년대 중반부터 밀리초 펄서와 쌍성 펄서 등을 대상으로 장기간 관측이 이뤄졌다.
전파망원경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광학망원경과 작동 방식이 다르다. 광학망원경이 천체에서 오는 가시광선을 모아 관측한다면 전파망원경은 우주에서 전달되는 전파를 포착한다. 이를 통해 펄서를 비롯해 별과 은하 등 다양한 천체와 우주 현상을 연구할 수 있다.
RT-64의 사진이 지금도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무엇보다 압도적인 규모 때문이다. 거대한 접시 모양의 반사경과 이를 떠받치는 복잡한 철골 구조가 숲과 대비되면서 마치 공상과학 영화 속 시설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거대한 구조물에는 한 시대의 우주개발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지구에서 수천만㎞ 떨어진 행성으로 탐사선을 보내고 그 희미한 신호를 다시 받아들이기 위해 당시의 과학기술이 만들어낸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소련의 심우주 탐사를 지원했던 대형 안테나는 시간이 흐르면서 우주의 전파를 관측하는 과학시설로 역할을 이어갔다. 칼랴진 RT-64는 냉전시대 우주개발 경쟁 속에서 탄생한 기술이 이후 천문학 연구 인프라로 이어진 과정을 보여주는 과학기술 유산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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