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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진 강물에서 꽃을 보다… 서연정의 『사랑할 수 있을 때』

  • 윤재훈 기자
  • 입력 2026.10.09 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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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한 번째 시조집 출간… 사랑과 상실의 경험을 자연의 이미지와 정형의 호흡으로 풀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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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은 여울을 만나 깨어진다. 그러나 서연정 시인의 눈에 그 부서짐은 “눈부시게” 일어난다. 삶이 뒤집히는 순간과 물이 흩어지는 순간을 겹쳐놓은 시인은, 그 끝에서 “처참한 골짜기에서 피어난 꽃”을 바라본다. 상처를 지우지 않으면서도 상처 너머로 시선을 옮기는 일. 새 시조집 『사랑할 수 있을 때』를 읽는 실마리는 이 짧은 작품에 놓여 있다.

서연정 시인이 열한 번째 시조집 『사랑할 수 있을 때』를 다인숲에서 펴냈다. 사랑과 상실, 관계의 끝과 생명의 지속을 다룬 이번 시집은 삶의 굴곡을 시조의 정제된 호흡 안에 담는다. 나무와 꽃, 강물과 바람은 풍경을 꾸미는 소재에 머물지 않는다. 시인의 내면과 맞닿으며 흔들리고, 때로는 인간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삶의 방향을 드러낸다.

시집의 정서를 압축하는 작품은 「점화」다.


누구나 몇 번씩은 살면서 뒤집힌다

강물이 여울에서 눈부시게 깨어진다

처참한 골짜기에서 피어난 꽃을 보게


첫 행은 누구나 겪을 법한 삶의 굴곡을 담담하게 꺼낸다. 이어지는 행에서 그 경험은 여울에 부딪히는 강물의 움직임으로 바뀐다. ‘뒤집힌다’와 ‘깨어진다’가 만들어내는 불안은 마지막 행의 꽃에 이르러 다른 빛을 얻는다. 특히 종장의 “보게”라는 말은 독자의 시선을 골짜기로 이끈다. 위로의 뜻을 설명하기보다 꽃이 핀 자리를 함께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처참한’이라는 말이 끝까지 남아 있다는 점이다. 꽃이 피었다고 골짜기의 참혹함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상처와 개화가 한 장면에 공존할 때, 작품은 손쉬운 낙관을 넘어선다. 제목 ‘점화’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읽힌다. 깨어짐의 순간에 새로운 감각과 생의 의지가 불붙는 것이다.

결핍을 대하는 시인의 태도는 「돌아온 토르소」에서도 드러난다. 머리나 팔다리가 없는 몸통 형상의 조각을 뜻하는 토르소는 이 작품에서 사랑의 말을 건네받는 ‘너’가 된다.

“사랑한다는 말로 너를 뒤덮어 줄게”라는 첫 행에 이어, 시인은 “잘린 어깨에서 거짓말처럼 소망이 피어날 거야”라고 쓴다. 훼손된 몸의 이미지와 소망의 발아가 맞물리는 대목이다. 사랑은 상대의 결핍을 알아보면서 그 곁에 머물겠다는 목소리로 나타난다. 

다만 「점화」가 풍경을 통해 회복의 가능성을 보여준다면, 이 작품은 소망을 직접 말하고 약속한다. 두 작품 사이에는 서연정의 서정이 지닌 서로 다른 결, 곧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과 대상에게 말을 거는 목소리가 함께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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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정 시인. 저자 제공

 

 

사랑의 또 다른 얼굴은 「잠잠한 풍령을 흔들어」에서 만날 수 있다. “가만히 놓아줘요 동행은 여기까지”라는 구절은 이별을 붙드는 대신 함께한 시간의 경계를 인정한다. 하지만 동행이 끝난 뒤에도 풍령에는 바람이 스미고 그림자가 흔들린다. 관계의 종료와 감각의 지속이 교차하는 장면이다.

이 작품에서 ‘놓아준다’는 행위는 체념만으로 읽히지 않는다. 상대를 보내는 말 뒤에 “잠잠한 生을 노래하게 해요”라는 청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별의 자리에서 시인은 다시 살아갈 가능성을 더듬는다. 시집 제목의 ‘사랑할 수 있을 때’도 이 대목에서 한층 복잡해진다. 사랑할 수 있는 때는 언제나 충분히 주어지는 시간이 아니며, 함께 있는 것만으로 완성되는 시간도 아니다.

「다시 보는 세계」는 그 시선을 일상의 낮은 곳으로 옮긴다. 쓰레기장에 번지는 풀꽃 앞에서 시인은 “아무 데서나 아무렇게나 축복이 피는구나”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버린 것들이 모이는 공간과 ‘축복’이라는 말의 만남이 작품의 긴장을 만든다. 꽃의 아름다움은 정갈하게 마련된 자리에서만 나타나지 않는다.

마지막 행의 “이토록 청순했던가 세상을 다시 본다”는 꽃을 바라보는 일이 세계에 대한 판단을 바꾸는 순간을 담는다. 이때 새로워지는 것은 풀꽃보다 그것을 보는 사람의 눈이다. 서연정의 자연 이미지는 이런 방식으로 인간의 감정과 인식을 움직인다.


해설을 쓴 노창수 문학평론가도 화자와 대상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감각에 주목한다. 출판사가 제공한 해설 소개에 따르면, 그는 사물의 미세한 움직임과 기미에 반응하는 태도를 서연정 시조의 특징으로 짚었다. 강물의 깨어짐, 풍령의 흔들림, 풀꽃의 번짐은 이러한 교감이 구체화되는 장면들이다.

추천사를 쓴 이태오 시인은 작품을 읽으며 자신이 “회복기를 맞았다”고 표현했다. 임성규 시인은 고난을 견디며 아이들을 키워낸 어머니의 노래를 이 시집에서 읽었다. 두 추천사는 이 책의 서정이 독자에게 닿는 지점을 보여준다. 그 밑바탕에는 상실과 고단함을 통과한 삶의 시간이 있다.


서연정 시인은 광주에서 태어나 1997년 《중앙일보》 지상시조백일장 연말장원, 199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부문 당선을 거쳐 작품 활동을 이어왔다. 『먼 길』, 『문과 벽의 시간들』, 『동행』, 『부활의 방식』과 단시조집 『투명하게 서글피』 등을 펴냈으며, 광주전남시조시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시인은 이번 책의 「작가의 말」에서 “꽃을 본 적이 있었던가?”라고 묻는다. 익숙한 꽃을 정말 보았는지 되묻는 이 질문은 시집에 실린 작품들을 향해서도 열려 있다. 깨어지는 강물과 잘린 어깨, 멈춘 동행과 쓰레기장의 풀꽃 앞에서 독자는 무엇을 보게 되는가. 『사랑할 수 있을 때』는 그 물음을 짧은 시조의 호흡에 담아 건넨다.

다인숲시선 08. 112쪽. 1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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