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찬란함보다 은은함이 아름다운 계절, 국화에게 배우는 삶의 품격
가을이 오면 마음도 조금 느려진다.
한낮의 햇살에는 아직 여름의 온기가 남아 있지만,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바람은 어느새 서늘하다. 길가의 나무들은 조금씩 빛깔을 바꾸고, 높아진 하늘 아래로 계절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다. 그렇게 가을은 요란한 인사도 없이 우리 곁에 머문다.
그 무렵 국화가 피어난다.
노랗고 하얀 꽃잎이 겹겹이 펼쳐지고, 바람이 스칠 때면 은은한 향기가 번진다. 봄날의 꽃들이 저마다 화사한 빛깔로 계절의 시작을 알린다면, 국화는 한 해가 저물어가는 길목에서 조용히 가을의 깊이를 전한다.
나는 가을에 피는 국화가 좋다.
눈부시게 화려하지 않아도 오래 바라보게 되는 꽃.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소박한 아름다움이 마음에 스며드는 꽃. 국화 앞에 서면 바쁘게 살아오느라 미처 돌아보지 못했던 시간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도 계절을 닮았다.
젊은 날에는 모든 것이 빨리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꿈도 사랑도 성공도 남보다 늦지 않게 찾아오기를 기대했다. 누군가 앞서가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조급해졌고, 원하는 만큼 이루지 못한 날에는 스스로를 탓하기도 했다.
그때는 몰랐다. 세상 모든 꽃이 봄에 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어떤 꽃은 따뜻한 봄볕 아래 피어나고, 어떤 꽃은 뜨거운 여름을 지나서야 꽃망울을 연다. 국화처럼 서늘한 바람이 불어야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내는 꽃도 있다.
사람의 삶이라고 다를까.
누군가는 일찍 자신의 길을 찾지만, 누군가는 오랜 시간을 돌아서야 비로소 마음이 향하는 곳을 발견한다. 한때는 실패라고 여겼던 일이 훗날 새로운 시작의 밑거름이 되기도 하고, 아프게 지나온 시간이 뜻밖의 깨달음으로 남기도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씩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는 없다는 것. 아무리 애써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다는 것. 그리고 때로는 붙잡는 용기보다 놓아주는 마음이 더 큰 사랑일 수 있다는 것.
그렇게 우리는 수많은 계절을 지나며 조금씩 달라진다.
한때는 쉽게 서운해했던 일에도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되고, 누군가의 무심한 말 한마디에 오래 흔들리던 마음도 조금은 담담해진다. 세상의 시선보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많아지고, 특별할 것 없는 하루가 얼마나 귀한 선물인지도 깨닫게 된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어쩌면 그런 것인지 모른다.
잃어버리는 것만큼 새롭게 얻는 것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가는 일. 더 많은 것을 가지려 애쓰기보다 이미 곁에 있는 것들의 소중함을 발견하는 일. 그리고 지나온 삶의 기쁨과 슬픔을 모두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일.
국화는 예로부터 매화, 난초, 대나무와 함께 사군자로 불렸다. 서리가 내리는 늦가을에도 꽃을 피우는 모습에서 옛사람들은 굳은 절개와 고결한 품성을 떠올렸다.
하지만 나는 국화의 강인함보다 그 고요함에 더 마음이 간다.
꽃을 피우기까지 얼마나 많은 햇살과 비바람을 지나왔을까. 봄이 가고 여름이 지나도록 묵묵히 자신의 시간을 살아온 끝에, 마침내 가을의 한가운데서 꽃을 피운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오래 살아온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
젊은 날의 반짝이는 아름다움과는 다른, 세월이 만들어낸 편안한 표정. 굳이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고, 자신의 아픔을 내세우기보다 다른 사람의 슬픔을 먼저 살필 줄 아는 사람. 삶의 굴곡을 지나왔기에 작은 기쁨에도 진심으로 웃을 수 있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름답다.
우리는 흔히 인생의 가장 빛나는 순간이 젊은 날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살아갈수록 아름다움에도 여러 빛깔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 봄날의 싱그러움이 아름답듯 가을날의 깊이도 아름답다. 뜨거운 열정이 빛나듯, 오랜 시간을 견뎌낸 마음의 온기도 빛난다.
그러니 인생의 어느 계절에 서 있든 자신의 시간을 아쉬워할 필요는 없겠다.
지나간 봄을 그리워하느라 눈앞의 가을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직 이루지 못한 것들을 헤아리느라 지금 곁에 있는 행복을 지나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을 햇살이 내려앉은 국화 앞에 잠시 머문다.
바람에 꽃잎이 가볍게 흔들린다. 그 작은 움직임을 바라보는 동안 마음속에 쌓여 있던 생각들도 조금씩 가라앉는다.
문득 오래도록 마음에 담아두었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고마웠지만 미처 고맙다고 말하지 못했던 사람, 서운한 마음을 풀지 못한 채 멀어진 사람, 이제는 다시 만날 수 없지만 여전히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사람.
가을은 그렇게 잊고 지냈던 마음들을 불러낸다.
그리고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게 한다.
잘한 일보다 아쉬운 일이 먼저 떠오르기도 하지만, 이제는 그 모든 순간을 조금 너그러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싶다. 서툴렀던 날도 나의 삶이었고, 흔들렸던 시간도 결국 오늘의 나를 만들어주었으니 말이다.
어느 계절도 영원히 머물지는 않는다. 꽃은 피었다가 지고, 푸르던 잎도 때가 되면 나무의 곁을 떠난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의 아름다움이 더욱 애틋하다.
국화가 피어 있는 이 가을도 머지않아 지나갈 것이다.
하지만 꽃이 머물렀던 자리에는 향기의 기억이 남는다. 사람도 그러했으면 좋겠다. 함께하는 동안 누군가의 마음에 작은 위로가 되고, 시간이 흐른 뒤에도 문득 떠올리면 미소 지을 수 있는 따뜻한 사람으로 남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올가을에는 조금 천천히 걸어야겠다.
길가에 핀 국화도 오래 바라보고, 높고 맑은 하늘도 자주 올려다보고, 곁에 있는 사람에게 따뜻한 안부도 건네야겠다. 바쁘다는 이유로 미뤄두었던 작은 행복들을 하나씩 찾아보고 싶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조금은 다정해지고 싶다.
지금까지 잘 걸어왔다고, 때로는 흔들렸어도 충분히 애썼다고, 앞으로의 날들도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살아가자고.
가을이 깊어간다.
국화는 저마다의 빛깔로 피어나고, 바람은 그 곁을 조용히 지나간다.
그 풍경 속에서 생각한다.
"삶이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꽃처럼 찬란해서가 아니라, 지나온 계절마다 저마다의 향기가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오늘도 국화 향기처럼 은은하고 따뜻한 하루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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