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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시간이 머무는 자리 ①] 회색 도심을 지워내는 가장 한국적인 채도

  • 이미선 기자
  • 입력 2026.02.19 19: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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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 한옥마을. [사진=EET NEWS]

 

전주를 단순히 비빔밥의 고장이나 한옥의 군락으로만 정의하는 것은 이 도시가 지닌 서사의 숲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회색빛 도심의 소음을 등지고 전동성당의 붉은 벽돌 앞에 서는 순간, 시간의 속도는 묘하게 지연된다. 

 

이곳은 조선왕조의 태동을 알린 자부심과 민중의 뜨거웠던 저항 정신, 그리고 근대 신앙의 처절한 순교사가 한데 섞인 묘한 기운을 풍긴다. 본지는 전주의 중심부를 관통하며 과거의 상흔을 살피고, 그것이 오늘날 어떠한 가치로 승화되었는지 그 궤적을 추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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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낮의 전동성당. [사진=EET NEWS]

 

붉은 벽돌이 증명하는 역설의 미학

 

한옥마을의 초입에서 시선을 잡아끄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전동성당은 전주의 첫인상을 자못 이국적으로 규정한다. 회색과 붉은 벽돌이 자아내는 웅장함은 주변 한옥의 부드러운 곡선과 선명한 대비를 이루며 도시의 긴장감을 더한다. 그러나 이 유려한 건축물의 기단 아래에는 한국 천주교회의 가장 시린 역사가 박동하고 있다.

 

이곳의 가치는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들이 처형당했던 풍남문 성벽 위에 세워졌다는 역설에 있다. 참혹한 박해의 현장이 신앙의 성지로 거듭나는 과정은 전주라는 도시가 지닌 포용의 크기를 짐작게 한다. 특히 성당 건립 당시 헐려 나간 전주성의 성벽 돌을 가져다 주춧돌로 삼았다는 대목은 구시대의 파괴 위에서 근대의 새로운 가치가 피어났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내부의 아치형 천장을 타고 흐르는 빛은 종교적 경계를 넘어선 경건함을 선사한다. 유교 문화의 심장부 한복판에 자리 잡은 이 서구적 신앙의 상징은, 서로 다른 가치관이 갈등을 넘어 어떻게 하나의 풍경으로 융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정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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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혁명기념관 내부. [사진=EET NEWS]

 

낮은 목소리들이 일궈낸 평등의 발아

 

성당의 경건함을 뒤로하고 골목의 깊숙한 곳으로 발을 들이면 동학혁명기념관과 마주하게 된다. 1894년의 전주성은 농민군이 점령했던 민초들의 성소였다. 기념관 내부를 채운 투박한 유물들은 화려한 장식보다는 당시 민중들이 품었던 뜨거운 갈망을 무겁게 대변한다.

 

이곳이 지닌 역사적 함의는 민(民)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꿈꿨던 최초의 근대적 시도였다는 점에 있다. 전주화약(全州和約)을 통해 관과 민(民)이 화합을 도모했던 기록은 오늘날의 거버넌스와 숙의 민주주의(熟議民主主義, deliberative democracy)의 원형을 미리 보여주는 듯하다. 

 

이는 단순한 민란이 아닌, 새로운 사회 계약을 향한 민중의 의지였다. 저물어 가는 조선왕조의 종언을 고하며  이 땅에 외세를 들이지 않겠다는 민초들의 의지와, 관민의 어려운 화합은 커다란 성과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문화적 가치로서의 동학은 인내천 사상이라는 거대한 인본주의 사조를 형성했으며, 이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타인에 대한 존엄이라는 묵직한 화두를 던진다. 전주가 인권의 도시로 거듭날 수 있었던 정신적 토양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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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전 정문. [사진=EET NEWS]

 

조선의 뿌리, 기록이 지켜낸 정체성

 

동학의 함성을 뒤로하고 걷다 보면 수령 수백 년의 고목들이 호위하는 경기전에 닿는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이곳은 전주가 왜 왕조의 발상지인지를 온 몸으로 느끼게 해준다. 정전의 문턱을 넘을 때 느껴지는 서늘한 공기는 관광객의 소란함을 일순간 잠재우는 권위를 지녔다.

 

경기전의 가치는 전주사고(全州史庫)의 존재에서 그 정점에 달한다. 임진왜란의 포화 속에서도 조선왕조실록을 끝까지 사수한 전주 선비들과 민초들의 헌신 덕분에, 현대의 우리는 500년의 방대한 기록 유산을 온전히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화려한 단청보다는 고즈넉한 목재의 질감이 돋보이는 경기전의 풍경은 한국적 미학의 정수인 여백의 미를 충실히 간직하고 있다. 모든 것이 디지털화되는 속도의 시대에 실물 기록의 무게를 견지한다는 것은, 미래 세대에게 정체성의 뿌리를 제공하는 가장 강력한 문화적 자산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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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목대에서. [사진=EET NEWS]

 

기와지붕의 파도를 넘는 호연지기

 

해질 무렵 발길은 자연스럽게 오목대로 향한다. 이성계가 황산전투 승리 후 종친들과 잔치를 벌이며 대업을 꿈꿨다는 이 언덕은 이제 한옥마을의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보는 조망점이 되었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정자에 앉으면 기와지붕들이 파도처럼 일렁이는 장관이 펼쳐진다.

 

오목대가 품은 역사적 가치는 새로운 나라를 설계하던 영웅의 기개가 서려 있다는 점에 있다. 정자에 앉아 바람을 맞으며 600년 전의 설계자가 바라보던 전주와 지금의 전주를 반추해 본다. 미래적 가치는 바로 이 조망에서 비롯된다. 

 

촘촘하게 연결된 "한옥의 곡선들은 현대 도시의 직선적 피로감을 치유하는 힘을 지닌다." 오목대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단순한 관광 자원을 넘어, 과거의 유산이 현대 도시 재생의 핵심 모델로서 어떻게 작동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정표와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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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준 한옥거리에서 귀여운 곰돌이들. [사진=EET NEWS]

 

빛바랜 기록 위로 흐르는 살아있는 숨결

 

전주 여정의 첫날은 순교, 저항, 보전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갈무리된다. 전동성당의 숭고한 희생, 동학의 평등 정신, 경기전의 기록 문화, 그리고 오목대에서 내려다본 전통의 생명력은 전주라는 도시를 지탱하는 굳건한 서까래들이다.

 

흔한 유행어로 치장하지 않아도 전주는 그 자체로 품격 있는 서사를 완성한다. 화려한 네온사인 대신 달빛 아래 빛나는 기와와 붉은 벽돌의 온기를 선택한 이 도시의 고집이 새삼 반갑다. 기록은 남고, 진심은 전해지는 법이다. 역사의 상흔을 짚어본 오늘의 산책은 여기서 갈무리되지만, 전주의 진짜 이야기는 어쩌면 해가 지고 난 뒤 사람들이 모여드는 골목의 온기 속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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