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길 위에 투영된 삶의 허기, 짬뽕과 빵이 빚어낸 연대기
지난 회차에서 군산의 근대를 석조 건물의 차가운 그림자로 정의했다면,
이번 여정은 그 그림자 속에서도 기어이 삶을 지탱해온 사람들의 체온을 쫓는다.
역사는 때로 거창한 비석보다 한 그릇의 뜨거운 국물이나 투박한 빵 한 덩이,
혹은 골목길을 채우는 달큰한 설탕 타는 냄새에 더 선명하게 박제되곤 한다.
항구의 거친 바람을 견디며 쌓아 올린 군산의 맛은 ,
곧 이 도시가 시대를 통과해온 증명서와 같다.
선로 위에서 피어오르는 달큰한 유년의 문장
경암동 철길마을은 군산의 현대사가 써 내려간 가장 밀도 높은 주거 형태 중 하나다. 1944년 신문 용지의 원료를 실어 나르기 위해 개설된 이 철길은 집과 집 사이 간격이 채 일 미터도 되지 않는 비좁은 골목을 관통했다.
기차는 2008년 운행을 멈췄으나, 이제 그 선로 위에는 연탄불 위에서 설탕을 녹이는 달큰한 냄새가 새로운 층위의 기억을 쌓고 있다. 철길 주변을 가득 채운 달고나와 뽑기는 단순히 관광객을 유혹하는 유희를 넘어선다. 미세한 바늘 끝으로 모양을 도려내던 그 긴장은 가난했던 시절, 적은 비용으로 누릴 수 있었던 최고의 유희이자 허기를 달래주던 달콤한 위로였다.
여기에 뽀빠이의 고소한 별사탕, 빨대 속 달콤한 맛을 정성스레 빨아 먹던 아폴로, 그리고 바삭한 식감이 일품이었던 라면땅 같은 군것질거리가 가세하며 시간의 바퀴를 뒤로 돌린다. 한때 불량식품이라는 투박한 낙인이 찍히기도 했던 이 작은 먹거리들은 사실 거창한 식탁을 가질 수 없던 시절, 서민들의 아이들이 선로 곁에서 나누던 가장 정직한 즐거움의 실체다.
교복 자락에 묻어나는 낡은 교과서의 향수
철길 마을의 진정한 묘미는 단순히 먹거리에 그치지 않고, 그 시절의 공간을 재현하는 데 있다. 빳빳하게 풀 먹인 검정 교복을 입고 완장을 찬 채 철길 위를 걷는 이들의 모습은 흡사 타임머신을 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당시 학교 앞 문방구에서 보던 누런 종이 질감의 교과서와 특유의 잉크 냄새가 가득했던 교실의 풍경이 이 골목에 투영된다. 70~80년대 세대에게는 엄격했던 훈육과 풋풋했던 첫사랑의 기억을, 그 이후 세대에게는 경험해 보지 못한 아날로그의 낭만을 선사한다. 산업의 도구였던 철길이 삶의 안마당을 거쳐 이제는 유년의 노스탤지어를 복원하는 입체적인 공간으로 진화한 셈이다.
항구의 허기를 달래온 붉은 국물의 미학
군산의 미각을 상징하는 단어는 단연 중화요리, 그중에서도 짬뽕이다. 개항 이후 이주민의 문화가 섞이는 용광로였던 군산에서 짬뽕은 서해안의 풍부한 해산물과 만나 이곳만의 독특한 문법을 완성했다.
그 중심에 서 있는 '빈해원'은 1950년대 초반에 개업하여 현재까지 그 맥을 잇고 있다. 2018년 등록문화재 제723호로 지정된 이 건물 내부로 들어서면 영화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웅장한 중정 구조가 관객을 맞이한다. 화려한 장식과 높은 층고는 과거 군산항이 누렸던 영화로움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대를 이어 내려오는 맛의 일관성이다.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해물의 깊은 맛이 우러난 국물은 거친 바다와 맞서던 항구 노동자들의 고단함을 달래주던 위로의 언어였다.
팔십 년의 세월을 구워낸 가장 오래된 식탁
군산 원도심의 아침을 깨우는 것은 이성당 앞에 길게 늘어선 행렬이다. 1945년 해방과 함께 한국인이 이어받아 문을 연 이곳은 국내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제과점이라는 수식어를 가진다. 적산가옥의 역사가 그러하듯 이 공간 역시 일제강점기 화과자(和, Wagashi, '菓子Confectionary)점이었던 자리를 계승했다는 점에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품고 있다.
이곳의 대표적인 메뉴인 단팥빵과 야채빵은 화려한 기교보다는 정직한 원재료의 맛에 집중한다. 얇은 피 속에 꽉 들어찬 팥소는 오랜 시간 변치 않는 가치를 유지해온 고집의 투영이다. 이성당은 단순히 기호품을 파는 곳이 아니라 군산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관통해온 상징적 장소다. 빵 한 알을 얻기 위해 인내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과거와 현재가 맛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자연스럽게 조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에필로그] 맛으로 기록한 기억의 지도, 다시 걷는 군산
군산을 미식의 도시라 부르는 이유는 단지 혀끝을 자극하는 화려함 때문이 아니다. 철길 마을의 군것질거리에 서린 가난한 날의 위로, 빈해원의 붉은 국물에 녹아든 노동의 고단함, 그리고 이성당의 빵 한 덩이를 지키기 위해 이어온 80년의 고집이 이 도시의 뼈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검정 교복을 입고 거닐던 교과서 속의 추억이며, 또 누군가에게는 처음 만나는 아날로그의 낭만인 곳. 군산의 골목은 멈춰버린 시간이 아니라, 매일 아침 구워내는 빵 냄새처럼 여전히 살아 숨 쉬는 현재 진행형의 역사다.
시간의 궤적을 따라 걷다 마주한 군산의 맛은, 결국 우리가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사람 사는 냄새 바로 그것이었다. 차가운 적산가옥의 적막을 깨고 피어오른 이 뜨겁고 달콤한 연대기는 앞으로도 군산을 찾는 이들의 마음속에 가장 따뜻한 지도로 남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