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유국이 아닌 소비국이 유가를 결정하는 시대"…호르무즈 재개방 이후 공급 과잉 변수까지, 세계 경제의 새 키플레이어로 떠오른 중국
중동의 포성이 잦아들고 있다.
미국과 이란은 세계 원유 해상 물동량의 약 20%가 통과하는 호르무즈 해협의 영구 재개방과 중동 원유 수출 정상화를 위한 협상에 속도를 내고 있다. 국제사회는 일단 최악의 공급 위기를 넘겼다는 안도감을 보이고 있지만, 정작 세계 금융시장과 에너지 업계의 시선은 협상 테이블 바깥을 향하고 있다.
바로 중국이다.
이번 중동 위기는 세계 석유시장의 권력이 생산국에서 소비국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으로 평가된다. 그 중심에는 세계 2위 원유 소비국이자 최대 제조국인 중국이 자리하고 있다.
"최악의 오일쇼크는 오지 않았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대이란 군사행동으로 촉발된 이번 위기는 수개월 동안 세계 경제를 위협했다. 하루 1,100만 배럴 이상의 원유 공급 차질이 발생했고, 브렌트유는 한때 배럴당 114달러까지 치솟았다.
시장에서는 배럴당 150달러를 넘어 200달러까지 상승할 수 있다는 전망도 잇따랐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국제 유가는 비교적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브렌트유는 최근 배럴당 78달러 아래로 내려앉으며 전쟁 이전 수준에 근접하고 있다.
이는 역사적 사례와 비교하면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다.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당시 아랍 산유국들의 금수조치로 세계 공급량이 약 7% 감소하자 국제 유가는 130% 넘게 폭등했다. 반면 이번 위기에서는 공급 차질 규모가 두 배 수준으로 확대됐음에도 유가 상승폭은 제한적이었다.
국제 금융기관과 에너지 전문가들은 그 배경으로 중국의 대응 능력을 꼽는다.
비축유 10억 배럴…중국의 전략적 대응
중국은 전쟁 이전부터 러시아와 이란산 할인 원유를 대거 매입해 막대한 비축유를 축적해 왔다.
시장에서는 중국의 상업용 및 전략 비축유 규모를 10억 배럴 이상으로 추산한다.
전쟁이 장기화되자 중국은 이 비축분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원유 수입량을 줄이고 저장 물량을 방출해 국내 공급 부족을 메웠다.
프랑스 금융그룹 소시에테 제네랄은 "중국은 하루 약 300만 배럴의 수입 조절 능력을 보유한 사실상 세계 최대의 수요 조정자"라고 분석했다.
이는 일본 전체 원유 소비량에 맞먹는 수준이다.
에너지 시장은 더 이상 생산량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누가 얼마나 소비를 늦추고, 언제 재고를 풀어내느냐가 가격을 결정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에너지 싱크탱크 엠버(Ember)의 대표 다안 월터는 "중국은 아시아 시장의 충격을 완충했고 결과적으로 세계 경제를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전기차가 만든 또 하나의 방파제
중국의 대응이 가능했던 또 다른 이유는 급속한 전기화다.
현재 중국에서 판매되는 승용차의 절반 가까이가 전기차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등 신에너지차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지난해 중국의 전기차 확산으로 하루 약 100만 배럴 규모의 석유 수요가 사라진 것으로 추산했다.
이는 세계 원유시장에 예상치 못한 안전판 역할을 했다.
과거에는 경제 성장과 석유 소비 증가가 비례했지만, 중국은 제조업 성장과 친환경 전환을 동시에 추진하면서 석유 의존도를 낮추는 구조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랜타우 그룹의 데이비드 피시먼 대표는 "중국의 전기화는 세계 원유시장의 훌륭한 배출구 역할을 해왔다"고 진단했다.
이제 시장은 공급 부족보다 공급 과잉을 걱정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불과 몇 달 전 공급 대란을 우려했던 시장은 이제 공급 과잉 가능성을 논의하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 재개방이 현실화되면 중동 지역에 묶여 있던 약 1억 배럴 규모의 원유가 시장으로 복귀할 전망이다.
국제에너지기구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내년 세계 원유 공급 증가폭이 수요 증가폭을 하루 470만 배럴 웃돌 것으로 예상했다.
이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최대 수준의 공급 과잉 가능성을 의미한다.
국가들은 위기 대응 과정에서 소진된 전략 비축유를 다시 채우려 하겠지만, 수요 증가가 이를 모두 흡수하기는 쉽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중국이 다시 사들일 것인가
결국 남은 질문은 하나다.
중국은 다시 원유를 사들일 것인가.
가격이 하락할 경우 중국은 전략 비축 확대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공급 과잉 우려는 상당 부분 완화될 수 있다.
반면 경기 둔화와 전기차 확산 속에서 수입 확대를 주저한다면 국제 유가는 추가 하락 압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원유 분석업체 클레퍼(Kpler)의 무유 쉬 수석 애널리스트는 "현재 과잉 공급을 흡수할 수 있는 나라는 중국뿐"이라며 "문제는 중국이 무엇을 얼마나 구매할 것인가"라고 말했다.
석유시장의 권력 이동
20세기 석유시장은 중동 산유국이 공급을 조절하고 미국이 이를 관리하는 구조였다.
그러나 21세기 중반으로 접어든 지금,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고 있다.
중국은 세계 최대 원유 수입국이자 최대 전기차 시장, 최대 배터리 생산국, 최대 태양광 제조국이라는 지위를 동시에 갖고 있다. 석유를 소비하면서도 석유 시대 이후를 준비하는 유일한 국가다.
이번 중동 위기는 이러한 변화의 방향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냈다.
과거 세계는 산유국의 감산 선언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이제 세계는 중국의 수입 통계와 비축유 동향, 전기차 판매량을 들여다본다.
중동의 전쟁은 끝나가고 있지만, 세계 에너지 패권 경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그 승부의 중심에는 총을 들지 않은 또 다른 강대국, 중국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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