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감염병 가운데 하나인 흑사병(Plague)이 기존 학계의 추정보다 훨씬 이른 약 5,500년 전부터 인간 사회에서 치명적인 집단 유행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국제 공동연구진은 시베리아 바이칼호 인근 선사시대 수렵채집인 공동체에서 발굴된 인골의 고대 DNA를 분석한 결과, 흑사병균(Yersinia pestis)이 대규모로 검출됐으며 어린이를 포함한 가족 단위의 사망이 잇따른 사실을 확인했다. 이번 연구는 흑사병이 농경사회가 형성된 이후에야 대규모 유행을 일으켰다는 기존 학설을 뒤집는 중요한 증거로 평가받고 있다.
이번 연구는 'Lethal plague outbreaks in Lake Baikal hunter-gatherers 5,500 years ago(5,500년 전 바이칼호 수렵채집인 집단에서 발생한 치명적 흑사병 유행)'라는 제목으로 발표됐다. 제1저자는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의 루어리드 맥클레오드(Ruairidh Macleod) 연구원이며, 프레데리크 V. 시어스홀름(Frederik V. Seersholm)을 비롯한 국제 공동연구진이 참여했다. 논문은 세계적 학술지 Nature에 2026년 6월 17일 게재됐다.
연구진은 러시아 남동부 바이칼호 주변의 4개 선사시대 공동묘지에서 출토된 후기 신석기 시대 인골 46구를 대상으로 차세대 염기서열 분석을 실시했다. 그 결과 18명에게서 흑사병균 DNA가 검출됐으며, 전체 검체의 약 39%에 해당하는 높은 감염률을 기록했다. 이는 지금까지 알려진 선사시대 흑사병 사례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으로, 단순한 산발적 감염이 아니라 집단 유행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연구진은 설명했다.
유전학적 계통 분석에서는 감염자들이 부모와 자녀, 형제자매 등 가족 단위로 연결돼 있는 사실도 확인됐다. 연구진은 첫 번째 유행이 한 세대 안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했으며, 사람 간 전파가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특히 8~11세 어린이들의 사망 비율이 높아 당시 흑사병이 소규모 공동체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판단했다.
이번에 발견된 흑사병균은 지금까지 알려진 고대 및 현대 균주와는 다른 계통으로 확인됐다. 연구진은 계통발생학적 분석을 통해 이 균주가 약 5,700년 이전에 이미 분화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는 흑사병균의 기원이 기존 추정보다 수백 년 이상 앞선 시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번 균주는 중세 유럽을 휩쓴 흑사병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벼룩 매개 전파 유전자 일부는 갖추지 않았지만, 강한 면역반응을 유발하는 초항원(superantigen) 유전자 영역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연구진은 이 때문에 당시 흑사병은 벼룩이 아닌 감염자의 호흡기 비말이나 밀접 접촉을 통한 사람 간 전파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연구진은 흑사병이 야생 마멋(marmot)과 같은 설치류에서 인간으로 전파된 뒤 공동체 내부에서 확산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바이칼호 일대 수렵채집인들은 마멋을 사냥하거나 가죽과 뼈를 생활용품으로 활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러한 접촉이 인수공통감염(zoonosis)의 출발점이 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무엇보다 이번 연구는 흑사병이 대규모 농경사회와 높은 인구밀도가 형성된 이후에야 확산됐다는 기존 이론을 근본적으로 수정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연구진은 이동생활을 하던 수렵채집 공동체에서도 치명적인 전염병 유행이 충분히 발생할 수 있었으며, 선사시대 인류 역시 오늘날 알려진 것보다 훨씬 복잡한 감염병 위협에 노출돼 있었다고 결론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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